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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아, 밖에 눈이 왔나 봐.”

늘 어린 그의 잠을 깨우던 어머니의 부드러운 음성이 평소보다 훨씬 더 반갑게 느껴졌다. 아래에서 늘 몸을 잡아당기던 잠기운도 오늘만큼은 존재하지 않았다. 방금까지 굳게 닫혀있던 눈꺼풀이 언제 그랬냐는 듯 동그랗게 떠짐과 동시에 침대에서 뛰쳐나가 바로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서 아침 뉴스를 보고 있던 아버지의 인사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고 한유진은 그대로 커다란 창을 가리고 있던 옅은 남색의 커튼을 걷었다.

밤새 소리도 없이 쌓인 눈이 늘 봐왔던 집 앞 풍경을 하얗게 바꿔 둔 채였다. 이미 몇 아이들은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즐기기 위해 나와 있는 것도 보였다.

“엄마, 저도…”

“밖에 나가려면, 먼저 씻고 밥도 먹고 나가야 해.”

그가 어떤 말을 하려고 했는지 이미 눈치챈 듯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속상한 마음에 입이 비쭉 나와 있던 한유진은 이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꼭 잡고 있던 커튼을 놓고 발걸음을 움직였다.

“유현이한테도 말해주고 올게요!”

신이나 보이는 그의 얼굴과는 반대로 어머니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가 나왔던 방을 지나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의 부모님의 방이 있었다. 열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퀸사이즈의 침대 옆으로 옅은 베이지색의 작은 침대 하나가 더 보였다. 어느덧 익숙해진 풍경에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면 그 안에 곱슬거리는 머리를 가진 작은 아이가 누워있었다.

아직은 아기 침대의 보호 울타리를 넘기에는 다소 작았던 한유진이 그 옆에 있던 의자를 밟고 올라가 침대 위에서 그의 동생을 내려다보며 ‘유현아’하고 이름을 불렀다. 평소와 같은 소리에 어느새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는 잠에서 깨어 말똥한 눈으로 자신을 부르는 형을 바라보았다. 한유현의 맑은 눈 너머로 한유진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밖에 눈이 왔어! 엄-청 많이 왔어! 눈 알아? 하얗고 엄청 차가운 거!”

한유진은 자신의 말을 어린 동생이 제대로 이해를 하는지 안 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가서 보여줄게!”

익숙하게 아이를 들어 올린 한유진이 다시 거실로 향했다. 동생이 이제 손을 잡으면 제법 잘 걸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항상 품에 안고 걷는 것을 더 좋아했다. 작고 부드러운 아이를 품에 안으면 느껴지는 따뜻함이 좋았으니까. 어느새 안겨있는 것이 익숙해진 아이가 자연스럽게 한유진의 목 뒤로 팔을 둘러 몸을 기대왔다. 그 감각이 기분이 좋아 더 세게 껴안았지만, 결국 커튼 앞에 도착하자 동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쉽게도 아직 제대로 크지 않은 그의 몸으로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 커튼을 여는 것은 불가능한 탓이었다.

결국, 창문 앞에 얌전히 아이를 앉혀둔 한유진이 이번에는 커튼을 제대로 걷어냈다. 챠악-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하얀빛이 눈을 찔러왔고 다시 신이 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그의 눈에는 아까와는 별 다를 바 없는 무표정의 아이가 보였다.

“응? 유현아 밖에 봐봐. 엄청 하얗지? 신기하지 않아?”

아이를 다시 안아 창가에 가까이 가져다 보여줘도 품에만 안겨올 뿐, 별다른 반응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 유현이는 눈을 별로 안 좋아하나봐요.”

“그러니? 밥 다 됐어. 유진아 나갈거면 얼른 먹어야지.”

“음, 네!”

아침밥 소식에 부엌으로 몸을 움직이면서도 시선은 계속 창 밖에 쌓여있는 눈을 향해 있는 채였다.

“엄마 다 먹고 나갈 때 유현이도 데리고 나가도 돼요?”

“친구들이랑 놀기 불편하지 않겠니?”

아직 어린 아들이 훨씬 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나가겠다는 말에도 의연치 않게 반응한 어머니가 괜찮다는 한유진의 말에 이내 무심하게 알겠다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한유진이 평소보다 빠르게 숟가락을 움직였다.

 

***

 

“다녀오겠습니다!”

씩씩한 인사와 함께 패딩에 목도리, 모자, 귀마개까지 완전무장한 한유진이 그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한유현을 데리고 현관문을 나섰다. 이미 집 앞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탓에 발에 밟힌 거뭇거뭇해진 눈들만 잔뜩 보였다. 결국 동생을 안고 뒤뚱뒤뚱걸으며 공원까지 도착하고 나서야 쌓여있는 하얀 눈을 찾을 수 있었다.

“유현아 여기 얌전히 앉아있어?”

한유진이 공원 벤치에 쌓여있는 눈을 대충 쓱쓱 치우고 한유현을 앉히며 말하자 곧 조용히 고개만을 끄덕여왔다. 제대로 답을 받고나서야 한유진은 몸을 돌렸다.

우선 주변에 있는 눈을 최대한으로 모아서 동그랗게 뭉쳤다. 공원의 흙이 묻어서 더러워지지 않도록 겉표면도 깨끗하게 깎아가면서 하얀 눈뭉치를 만들었다. 그걸 그대로 한유현에게 건내주자 장갑을 제대로 끼지못한 작고 하얀 손이 그것을 건내 받았다.

“어때? 엄청 차갑지?”

차가운 감촉에 금방 내려둘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반대로 한유현은 그대로 받은 눈뭉치를 계속해서 들고 있었다.

“응? 안 차가워? 유현아 손 엄청 빨개!”

당황한 한유진이 뒤늦게 눈을 치우자 그 아래로 차가운 눈 모양 그대로 빨개진 손이 보였다.

“유현아 손 엄청 차갑겠다 이럴 땐 호-. 하는 거야 호-.”

“호오?”

“응! 이렇게 손을 모아서 하는 거야!”

한유진이 먼저 시범을 보이자 한유현 역시 똑같이 작은 손을 모아서 호~ 하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다가도 우리 유현이 진짜 눈에 별로 관심이 없나봐 어떡하지? 하는 고민이 들었다. 자신은 언제부터 눈을 좋아했더라. 자신이 3살이던 때에 눈을 좋아했었는지, 싫어했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결국 한유진이 복잡한 생각없이 동생의 취향을 존중해주기로 결심했을 때 쯤 앉아있던 한유현이 그의 팔을 붙잡아왔다.

“응? 왜?”

“저거.”

팔을 잡지 않은 오른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옆에서 어느새 자신들의 몸뚱이만한 눈덩이를 굴리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저거? 저렇게 크게 만들어줄까? 저건 눈사람 만들려고 하는 거야.”

눈쨔람? 짧은 발음으로 따라한 한유현이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생이 드디어 자신이 좋아하는 눈에 흥미가 생겼다는 사실에 잔뜩 신이 난 한유진이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눈뭉치를 그대로 바닥에 내려두고 주변을 긁어 조금씩 크게 만들기 시작했다.

한참을 굴려도 혼자서 만드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던 탓에 아까 한유현이 가리킨 아이들의 눈덩이보다야 훨씬 작았다. 그래도 한유진의 허리 높이까지 오는 눈사람이 만들어졌다. 눈은 대충 굴러다니는 돌맹이를 박아두었고, 적당히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로 만든 입과 팔은 TV에서 보던 예쁜 눈사람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열심히 만들었으니까. 뿌듯함을 가득 담아서 아직까지 얌전히 앉아있던 한유현을 향해 자신의 결과물을 내보였다.

“어때 유현아! 엄청 크지? 우리 유현이만한 것 같은데?”

자신있게 보여준 것과는 다르게 한유현의 반응은 생각보다 격하지 않았다. 그냥 자신을 따라서 완성을 축하하는 박수를 짝짝 치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에도 자신의 동생이 다른 또래의 아이들보다 말이나 반응이 적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탓에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지만, 기운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한참을 눈을 굴리는 동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된 것인지 주변의 아이들도 하나둘씩 떠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정확한 자신의 배꼽시계가 이제 슬슬 집에 돌아가야함을 알리고 있었다.

“유현아, 형이랑 맘마 먹으러 가자!”

한유현을 다시 안아들고 발걸음을 옮기자 한유현에 품에 안긴채로 그의 등을 쳤다.

“형아, 저거-.”

“응?”

한유현은 미숙하게 만들어진 벤치앞의 눈사람을 가르키고 있었다.

“저거? 왜? 다시 놀까?”

그 말에는 한유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느덧 말이 짧은 동생에게 익숙해진 한유진이 이내 그 뜻을 이해한 듯 다시 말했다.

“저거 가져갈까?”

그제야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맞춘 것은 좋았으나 괜히 욕심을 낸 탓 제법 크게 만들어진 눈사람을 집에 가져가는 것은 무리였다. 잘 설명하면 고집을 부리지 않을 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 원하는 걸 얘기했던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동생의 소원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결국, 한유진이 결심한 듯 안고 있던 한유현을 내려두고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유현아 잠시만 기다려?”

곧 크게 만들어져있던 눈덩이들 앞에서 한참을 씨름하던 한유진이 다시 두 손에 작은 눈사람 두 개를 들어올렸다. 아까 크게 만들었던 것보다 훨씬 대충인, 눈만 간신히 붙어있는 간단한 눈사람이었지만, 그 두 개의 크기가 조금 달랐다.

“이거는 형아 눈사람이고, 이거는 유현이 눈사람이야!”

그렇게 이야기하며 조금 더 작은 쪽의 눈사람을 한유현에게 내밀었다. 곧 손을 긴 소매로 가린 채 작은 눈덩어리를 받아든 한유현이 옅게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우리 유현이 웃었어!!”

동생이 자신에게 웃어줬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소문을 내려고 하는 한유진의 탓에 둘은 한참을 더 밖에 있다가 간신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들고 간 눈사람은 결국 냉동실에서 일주일을 채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다음날 햇빛에 전부 녹아버렸던 하얀빛의 세상보단 더 오래, 그들의 추억에 남아있었다.

림츄 님 (@realchu_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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