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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주의*

 

형제의 근원

 

 

 

 

 

 

 

 

 

 

태초의 기억은 저를 보고 활짝 웃는 형의 얼굴이었다. 보통은 부모의 얼굴, 혹은 저를 낳아준 어미의 얼굴을 떠올리겠지만 한유현은 한유진만을 제일 먼저 기억하고, 눈에 익혔다.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유현은 본인이 남들과 틀리다는 것을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빛을 마주한 그 순간에도, 한유현은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 속에서 저를 부르는 속삭임을 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부름이 아니었다. 아주 작고, 불길한 형체의 무언가. 그것이 기분 나빴다는 것 또한 아니었다. 오히려 어정쩡한 자세로 저를 안아 든 어미보다 더 안락하고 편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박차고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한유현은 그러니까, 본래 있어야 할 곳을 벗어나 홀로 외딴곳에 떨어진 짐승과 같았다. 이곳은 한유현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한유현은 본능적으로 저를 부르는 저 소리를 따라가야 함을 느꼈다. 마음만 내킨다면, 언제든지 따라나설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위치한 저곳을.

그러나 한유현은 떠나지 않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제 손을 잡은 인간을 바라본다. 시선을 느꼈는지 복숭앗빛으로 물든 뺨을 가진 누군가가 고개를 숙이고 기꺼이 눈을 마주한다.

 

“왜, 유현아?”

 

그는 한유현의 형이었다. 처음부터 한유현의 손을 잡아준 건 부모가 아닌, 한유진이었다. 다섯 살 터울의 형은 세상의 환영도 받지 못한 채 태어난 동생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무리를 벗어나 홀로 눈을 뜬 짐승에 목줄을 채우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어 준 것이다. 한유현은 이 감각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거절할 필요는 없으니까. 별로 나쁜 기분도 아니었으니까. 굳이 이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당연한 거지만 한유현은 어디서든 기피 대상 1위로 낙인찍혀 있었다. 말썽을 부린 것도 아니고, 사람을 죽인 적 또한 없는데도 말이다. 사람들은 한유현을 꺼려했다. 정확히는, 두려워했다. 고작 말도 잘 내뱉지 못하는 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차갑게 가라앉은, 아이 같지 않은 눈을 가진 한유현을 께름칙하게 여겼다. 그건 부모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유현은 그들의 체온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맞닿은 적조차 없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한유현이 기억하는 인간의 체온은 형인 한유진에게 비롯됐다. 한유현은 한유진에게서 인간에 대해 배웠고, 인간으로서 사는 법을 습득했다.

본인이 인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해 보고 듣고 느꼈다. 오로지, 한유진에게서만.

 

“귀여워, 내 동생!”

 

한유현 또한 저를 향한 한유진의 사랑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저를 안아주고 달래듯 토닥이는 그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어쩐지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묵묵히 품에 파고들 뿐이었다. 그럴수록 한유진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며 제 동생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한유현이 5살일 때 한유진은 고작 10살이었다. 어린애와 아기일 뿐인데, 이 두 어린 형제를 보살펴주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는, 한유진을 돌봐주는 이가 없었다. 한유현은 한유진이 직접 챙겨줬기에 곤란한 일 없이 유치원도 무사히 다닐 수 있었다. 물론 챙겨줬다고 말해봤자 어린애에 불과하기에 제 부모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끝이긴 하다만, 아무튼 한유현은 어느 정도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한유진은 부모의 손을 뿌리치고 동생의 손을 붙잡은 뒤로,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게 됐다. 밥을 굶게 됐다던가 하는 건 아니었지만, 너무 이른 독립을 하고 말았다. 본인도 학교에 가야 하면서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것만 봐도 말 다 한 셈이었다. 모두가 형제를 안타깝게 바라봤지만, 그 누구도 직접적인 도움을 건네지는 않았다. 한유현은 그것이, 너무나도 거슬리게 느껴졌다. 그리고 곧바로 스스로가 느낀 감정에 흠칫 놀랬다.

한유현에게 한유진은 무엇인가. 표면상으로는 가족이지만, 이미 한유현에게 있어 가족은 무의미한 호칭이나 다름없었다. 한유진의 손길이 나쁘지 않아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다였다. 그 이상의 감정을 느낄 필요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한유진의 행동에 의문을 품고, 저를 재운 뒤 홀로 어두운 부엌에서 조용히 찬밥을 꾸역꾸역 먹는 것에 불만감을 느끼게 됐다. 그럴 필요가 분명히 없는데도 말이다. 한유현은 이 불필요한 감각을 쳐내야겠다고 판단했다. 저와 동족이 아닌 것에 감정을 품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태생부터 다르다. 한유현은 절대, 제 형과 나란히 있을 수 없을 거다.

 

 

***

 

 

한유현이 다니는 유치원은 아주 적은 수의 원생으로 구성된 주일 유치원이었는데, 사실상 부모에게 버려져 갈 데 없는 애들만이 모였으니 보육원이나 다름없었다. 한유현은 형이 있으니 예외였지만, 형도 나이가 어렸기에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고르게 됐다. 시설이 좀 오래됐지만, 관리는 깔끔한 편이고, 선생님도 모두 연민을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한유진은 이곳이 썩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가장 큰 단점이라면 차가 없다는 점이었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보육원과 마찬가지인 곳이었기에 한유진이 하교할 때까지 한유현을 맡아둘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한유진은 한창 친구들과 뛰어놀 나이에 학교가 마치면 곧바로 동생을 데리러 가는 게 일과였다.

그리고, 한유현은 늘 형이 데리러 오는 시간보다 일찍 유치원을 나섰다. 뒤쪽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것도 이내 빠르게 사라졌다. 동정심과 정의감은 구분되는 감정이었다. 길바닥에 나앉은 거지가 안타까워도 그냥 지나쳐가는 것처럼, 의지할 사람이 형밖에 없는 어린 동생이 불쌍해도 그저 그뿐이었다. 하물며 한유현은 다른 아이들처럼 사랑스럽지도 않았다. 선생이 돌보는 원생이 비에 젖은 토끼들이었다면, 그 중 오직 한유현만이 섬뜩한 눈을 가진 괴수였다. 그런 괴수가 홀로 나가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나가준다면야 고마울 따름이었다.

한유현은 밖으로 나와 집의 반대쪽 방향으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겨울이어서 그런지 대부분의 사람이 옷을 꽁꽁 싸매 입으며 몸을 웅크리고 걸었는데, 한유현은 얇게 입은 편인데도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코와 귀는 빨개진 채였지만, 그게 다였다. 더위도, 추위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세세한 점이 한유현은 인간이 아니라고 못 박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착각하고 있었다. 형이 저를 너무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마냥 대하길래. 정말 아무렇지 않게, 평범한 인간을 대해주듯 굴길래. 그래서, 어쩌면, 하고 소망을 품었던 모양이었다. 계절적인 추위보다 더한 싸늘함이 가슴을 후벼파듯 스쳐 간다.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던 부름이 다시 시작된다. 한유현은 발걸음을 멈추고 부름에 귀를 기울였다. 잠재웠던 불씨가 점차 크기를 키워나간다.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 저를 삼키고 주변 모든 것을 불태울 마냥 위협적으로 커지던 불이 한유현에게 이리 오라, 속삭인다. 사납게 일렁이는 불꽃이 어울리지 않게 손짓을 해댄다. 어느덧 혼자 걷는 어린아이를 보고 의아해하던 사람들이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고 한유현에게서 거리를 둔다. 한유현은 확연히 드러나는 괴리감을 숨기지 않은 채 부름에 응하기로 했다. 멈췄던 걸음을 옮기고,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단편적 기억들을 태운다. 겁에 질린 눈을 하던 두 남녀, 까진 무릎을 모른 체하던 노인, 살짝 닿기만 해도 울음을 터뜨리던 아이. 그리고, 부드러운 눈을 하던 형, 까진 무릎에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준 형, 살짝 닿으면 마저 손을 잡아주던 형. 한유진, 한유진……

어째서인지, 다른 기억은 모두, 불태울 수 있는데, 형에 대한 기억은, 조금도 태울 수 없어서ㅡ.

아, 언제부터였지.

저를 부르는 소리가, 저리 볼품없고 절박하게 들리게 된 것은.

 

“유현아!”

 

저 앞에 있던 한유진이 덜덜 떨리는 다리로 달려오더니 한유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참 이상했다. 밖에 오래 있어서 몸이 차가울 게 분명한데. 뿐만 아니라 한유현은 그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할 텐데. 형의 품이 너무나도 따뜻하고 아늑했다. 한유현이 품고 있던 거센 불길보다도 못하는 온기였는데, 이렇게 포근하고 편안한 기분이라니.

 

“유현아, 왜 혼자 나간 거야….”

 

한유진이 품에서 동생을 떼어 내며 물었다.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된 채였고, 도중에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손바닥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올곧은 시선은 한유현만을 담아내고 있었다.

 

“형이, 형이 너무 늦어서 그래? 미안해…….”

 

틀리다. 한유현은 단지, 형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섣부른 판단을 했던 거다. 형은 절대 저를 이해하지 못할 거며, 종족부터 틀린 우리가 함께할 순 없을 거라고 단정했다.

 

“앞으로는, 좀 더 빨리 갈 테니까…….”

 

훌쩍이는 목소리는 전혀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한유현은 혼자서도 집에 갈 수 있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작고 약한 불꽃을 놓고 싶지 않아졌다는 거였다. 한유현이 작은 손을 뻗어 형의 옷깃을 붙잡았다. 두서없이 말을 내뱉던 한유진이 그쳤던 눈물을 다시 펑펑 흘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소리 내지도 못 한 채 끅끅 울어대며 다시 동생을 안았다. 늘 형의 품에서 미동도 하지 않던 한유현은, 처음으로 두 팔로 형을 감싸 마주 안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한유진은 본인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한유현에게 입혀줬다. 두 형제 다 새빨개진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붙잡은 채 집에 돌아갔고, 그날 밤 결국 한유진은 앓아누웠다. 한유진에게는 약간의 도리를 갖고 있던 부모가 감기약을 사다 줬고, 한유현이 그것을 물과 함께 가져갔다. 한유진은 힘겹게 약을 삼킨 뒤 서둘러 동생을 방 밖으로 내보냈다.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다 너도 감기에 걸리게 될 거라고 형이 간절하게 말하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을 닫자마자 억누른 기침 소리가 새어 나온다. 한유현은 빈 물컵을 든 채로 형의 기침이 멎을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렸다. 몇 분쯤 지났을까. 다행히 기침은 금방 멈춘 듯했다. 그러나 이번엔 기침 소리 대신 불쾌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하니 형제의 부모가 부엌에서 대화 중이었다. 한유현이 아무리 남들보다 오감이 발달했더라도 다섯 살의 나이로써 어른의 말을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형이 아닌 다른 이의 말 따위야 들을 가치도 없었다. 그러니 원래 같았더라면 저들이 뭐라 떠들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겠지만, 한유현은 경청을 택하기로 했다.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유진이는 애가 참 똘똘하고 착한데, 왜 하필이면…….”

“기껏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이 저 모양이니, 나 원.”

“됐어, 없는 셈 치자고. 걔들도 그게 나을 거라 생각할 걸? 특히 그, 작은 쪽 말이야.”

“어휴, 걔는 애가 너무 소름 끼친다니까요. 내 배에서 나온 거라니, 믿기지 않아요.”

 

깊은 한숨 소리 이후 짧은 침묵. 안 그래도 가라앉은 분위기가 바닥을 친다. 시계 초침 소리가 어색하게 울리고, 여자가 무언가 깨달은 듯 숙였던 몸을 펴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곧 유진이 생일인데.”

“벌써 그렇게 됐나? 정확히 언제였지?”

“큰 애는 좀 기억해줘요. 7일이요, 7일. 내일모레라고요.”

“지난번처럼 대충 케이크 사다 주면 되겠지.”

“음, 그럼 되겠네요. 친구들하고 놀라고 용돈도 같이 주니까요.”

 

한유진의 생일. 한유현은 제 형의 생일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생일날이면 식탁엔 작은 조각 케이크와 지폐 한 장이 놓여 있었고, 한유진은 혼자 먹어도 부족할 크기의 케이크를 동생과 함께 나눠 먹었다. 돈은 꼬깃꼬깃 접어서 책상 서랍 안에 뒀다가 오직 한유진만이 기억하는 한유현의 생일날, 그에게 케이크와 선물을 사다주는 데 쓰였다. 한유현은 생일의 기념적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고 케이크도 그닥이었지만, 그날이 특별한 날이라는 건 잘 알았다. 형이야 언제든지 잘 웃어줬고 잘 대해줬지만, 생일 때만큼은 확실히 평소 보다 들떠있었으니까.

 

“그러고 나선 오랜만에 바다나 보러 갈까?”

“어머, 좋죠. 아예 하루 자고 와요.”

깔깔깔. 듣기 싫은 웃음소리가 형의 기침 소리보다 더 크게 퍼진다.

 

 

                                  ***

 

 

다행히 한유진의 감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애초에 심한 편도 아니었고, 하루를 꼬박 자고 일어나자 몸이 가뿐해졌다. 부모가 사다 준 약 덕택도 있었다. 한유진은 오늘치 약을 삼킨 뒤, 옆에 앉아있던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원래 같았다면 지금쯤 한유현은 유치원에 있어야 하고 한유진은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지만, 한유진이 병결하면서 자연스레 한유현도 유치원을 빠지게 됐다. 형이 데려다주지 않으면 데려다줄 사람도, 데리러 올 사람도 없었으니까.

한유현은 약봉지를 만지작대다가 형이 덮고 있는 이불 틈을 파고들었다. 한유진이 당황한 듯 어어, 거리다가 이내 몸을 뒤로 물렸다.

 

“안 돼, 유현아. 형 아직 완전히 나은 게 아니니까….”

 

원래는 한유진이 한유현을 끌어안은 채 나란히 자고는 했으나 어제부턴 감기 때문이라며 멀찍이 떨어져서 자야만 했다. 혼자 자는 게 무서운 것도 아니고, 별문제 삼을 건 없었지만 그래도 맘에 들지 않았다. 한유현이 고개를 저으며 더욱더 형에게 달라붙었다. 한유진은 곤란한 기색을 내보이면서도 더 이상 밀어내지 않았다.

 

“갑자기 어리광이 늘었네. 형이 조금쯤은 편해졌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럽다. 편해졌냐 물어보면, 처음부터 불편했던 적은 없었다. 단순히 우린 다르니까. 인간과 불이니까. 곁에 있어봤자 태워버릴 게 뻔하니까. 어차피 잿더미가 되어 흩날려 갈 텐데, 굳이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지난번 일로써 한유현은 제 형을 태울 수 없단 걸 알게 됐다. 분명 다른 모든 건 너무나 쉽게 불태울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한유진에 관한 건 그 무엇도 재로 만들지 못했다.

그제야 한유진의 온기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불은 불을 태우지 않는다. 함께 겹쳐져서 본래의 모습을 잃고 더욱 커질 뿐이지, 열기가 약해진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한유진도 결국은 하나의 불이었다. 한유현이 가진 불보다 한없이 작고 약하지만, 절대 꺼지지 않고 어디론가 옮겨붙지도 않을 단 하나뿐인 불. 그게 바로 형이었다.

 

“…싫어?”

“뭐? 아니아니, 싫을 리가! 절대 아니야. 오히려 너무 좋아!”

 

그동안은 한유진의 일방적인 애정 표현만 있었을 뿐, 한유현 쪽에선 그 어떠한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처음으로 제 말에 대답해 주는 동생에 조금 감격한 듯, 한유진이 들뜸을 감추지 못했다.

 

“…내일은 부모님께 외식하자고 말씀드려 볼까? 내 생일이니까, 들어주실지도 몰라.”

 

한유진이 부모와 마지막으로 외식한 지 어느덧 5년이 훌쩍 넘었다. 예전에는 자주 나가서 사 먹었었는데, 한유현이 태어난 뒤로는 부모님 곁에 있는 것도 힘들어졌다. 그러니까, 한유현은 여태 가족끼리 나가서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한유진은 그게 마음에 걸렸다. 부모님께서 동생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가족이니까 들어줄지도 몰랐다. 동생과 케이크를 나눠 먹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한 번쯤은 넷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한유진도 결국은 어린아이였다. 처음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몰라도 이미 그때가 얼마나 행복했고 따듯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음 한쪽이 외로움으로 채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유현에게도 부모의 애정을 알려주고 싶었다. 다른 집들은 어떤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주변 어른들의 수군거림으로써 동생의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대충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 이유는 짐착조차 되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번 기회로 화해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럼 좋겠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스르륵 눈이 감긴다.

 

 

 

한유진이 다시 눈을 뜬 건,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릴 때였다. 고개를 살짝 내리니 잠든 동생의 정수리가 보였다. 아직 잠기운이 가시질 않아서 한유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며 가만히 눈을 깜박이고 있는데, 곧 익숙한 바퀴 끄는 소리가 들리자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음과 동시에 몸을 벌떡 일으켜 문고리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현관문 앞에서 캐리어를 끌고 있는 부모와 눈이 마주쳤다.

 

“아, 유진아.”

“어디, 어디 가세요?”

 

사실 부모가 두 어린 형제만 내버려 두고 놀러 가는 건 딱히 이례적인 일도 아니었다. 한유현은 애초에 한유진이 돌보다시피 하고 있었고, 찬밥을 데워 먹고 반찬을 꺼내 먹는 것쯤은 한유진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두 분이 이번에도 여행을 가신다 해도 별로 특별할 건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저, 내일 생일인데….”

 

한유진이 예전에 받은 사랑을 잊지 않은 이유는 일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그의 생일 때문이었다. 내 생일을 잊으신 건 아닐까, 선물까진 바라지도 않는데, 하고 걱정할 때마다 두 부부는 작은 케이크와 용돈, 그리고 다소 성의 없을지언정 한유진에겐 그 무엇보다 간절한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주곤 했다. 생일은 한유진이 아직 가족의 한 구성원이라는 확신을 받을 수 있는 날이었다. 한유진을 미워한다면 챙겨줄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생일은 한유진의 큰 위안이었다.

 

“케이크 먹고 싶어서 그러니? 냉장고에 넣어 놨으니까 꺼내 먹어.”

 

하지만 처음부터 부부는 한유진을 위해 그의 생일을 챙겨준 게 아니었다. 그저 부모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정도면 좋은 부모일 거라고 자기합리화를 하기 위한 증거물로써 챙겨준 것뿐이었다. 그 이상을 베풀어야 할 이유 따위는 전혀 없다는 소리였다.

 

“어머, 유진아. 왜 울고 그래.”

“돈이 부족한 거 아니야?”

“초등학생한테 그 정도면 충분하죠. 왜 갑자기 이러니? 여행은 전부터 갔던 거잖아.”

 

한유진은 동생이 태어난 뒤로 부모에게 떼를 쓴 적이 없었다. 저마저 버려질까 봐 무서웠으니까.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막연한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형이니까, 울면 안 되는데. 자고 일어난 나른함 때문인 지 감정이 격해진 모양이었다. 몇 번이나 입술을 짓씹으며 소리를 참아보려 했으나 턱을 타고 바닥에 뚝뚝 흐르는 눈물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안 가면 안 돼요? 유현이를 예뻐해 주시면 안 돼요? 다 같이 어디 놀러 가고 싶어요. 영원히 내뱉지 못할 말이 혀끝을 쓰게 맴돈다. 결국 한유진은 눈물이 채 멈추기도 전에 몇 번 달래는 말을 던지고 가뿐히 밖을 나서는 두 남녀를 붙잡지 못했다.

한유현은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곧 저 처절하게 울부짖는 이의 정체를 깨닫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자 거실 한복판에 엎어진 채 작은 어깨를 들썩이는 형이 보였다. 어찌나 크게 우는지, 동생이 바로 근처까지 온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한 발짝 떨어진 채로, 한유현이 한유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형.”

 

굉장히 작은 목소리였으나 한유진이 그걸 못 들을 리가 없었다. 흠칫 놀란 듯 어깨가 크게 들썩였고, 숨이라도 참은 건지 간헐적으로 떨던 몸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유현이 다시 한번 더 형을 입에 담으며 그 옆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형.”

“아… 유현아.’

 

몸을 숙여도 제 동생이 옆에 앉아있는 것 정도는 보였다. 저러고 오래 앉으면 다리가 저릴 텐데. 놀라서 그런지 다행히 눈물은 쏙 들어갔기 때문에 한유진이 몸을 일으켰다.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은 뺨이 썩 보기 좋지 못했다. 팔을 들어 올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벅벅 닦은 뒤, 정적이 흘렀다. 한유현은 형이 우는 이유를 몰랐고, 달래주는 방법 또한 몰랐기에 그저 하염없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만 빤히 쳐다봤다. 한유진은 그런 동생의 시선을 애써 피하다가 마지못해 눈을 마주했다.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왠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어린 동생도 한 번을 울지 않았는데, 이렇게 울 필요가 있었나. 부모님이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내겐 하나뿐인 소중한 유현이가 있는데.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의문이 꼬리를 물고 연달아 이어지다가 이내 매듭을 짓는다. 한유진은 어렸다. 단순히, 그것뿐이었다.

 

“…케이크 먹을래? 형 생일이니까.”

 

아직 열 두시가 지나지 않았으니 정확히 생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의미가 사라진 이상 세세한 것까지 따질 필요는 없었다. 한유현은 평소보다 약간 가라앉은 형의 미소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돈은 늘 그렇듯 한유진의 책상 서랍으로 들어갔다. 케이크는 생크림 위에 딸기 하나가 올라간, 매년 생일 때마다 먹은 그것이었고, 딸기는 두 형제가 한 입씩 나눠 먹었다. 케이크를 다 먹고 난 뒤엔 시간도 늦었으니 씻고 나서 바로 잘 준비를 했다. 아직 말끔히 나은 게 아니니 오늘도 한유현과 따로 자야 했겠지만, 한유진은 저에게 매달리듯 달라붙는 동생을 굳이 떼어내지 않았다.

다음 날, 평소보다 일찍 깬 한유진은 한유현이 깨지 않도록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부모가 여행을 갔더라도 학교와 유치원을 그냥 막 빠질 순 없는 터라 해야 할 게 많았다. 방을 나온 한유진은 제일 먼저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칸에는 반찬 가게에서 사 온 멸치볶음과 계란말이, 김치 그리고 참치 캔이 있었다. 그것을 모조리 꺼낸 뒤 식탁 위에 놓인 즉석 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리자 잠에서 깬 한유현이 비척대며 나왔다. 동생을 의자에 앉혀놓고 옷장을 열어 원복과 저가 입을 옷을 꺼낸 뒤 밥을 동생의 앞에 놔주었다. 참치 캔은 캔따개에 숟가락을 끼워서 겨우 땄고, 나머지 반찬들과 함께 식탁 위에 차렸다. 그다음엔 동생의 바로 옆에 앉아 손에 숟가락을 쥐여준 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호오 불어주며 열까지 식혀주고 일일이 반찬도 얹어 주었다. 식사가 끝난 뒤엔 반찬들은 다시 냉장고에 넣었고, 그릇들은 개수대에 쌓아두었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동생을 씻겨주면서 함께 씻었고, 물기를 모두 말리고 옷을 챙겨입고 나서야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지금 당장 학교로 뛰어가도 간신히 지각을 면할까 말까 할 텐데 한유진은 한유현의 손을 꼭 잡고 유치원으로 향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온몸이 새빨개질 정도로 추웠었는데, 오늘은 날이 벌써 풀린 느낌이었다. 어쩌면 맞닿은 손에서 느껴지는 이 작은 온기가 겨울의 추위를 이겨낸 걸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좋았다. 이제 한유진은 이 손을 절대 놓을 수 없을 거다. 부모야 없어도 괜찮다. 동생만 있다면. 내 편이 되어줄, 나와 함께 해 줄 단 한 사람만 있어도. 버틸 수 있었다. 그러니 절대 놓지 않을 거다.

멀쩡히 한유현을 데리고 온 유진을 보며, 원장은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한유진은 그게 거슬렸으나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아이였기에 애써 웃으며 인사했다.

 

“요전번에 유현이가 멋대로 나가서 죄송합니다. 저, 오늘부터는 선생님께서 유현이를 집에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학교 끝날 때까지 기다리게 하는 건 좀 그래서요. 또 혼자 나갈 수도 있고요.”

 

굳이 부탁한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엄연히 애를 잘 보살피지 못한 원장의 잘못이자 책임이었다. 원장은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한유현은 혼자서도 집에 갈 수 있으니 보호자 따위야 별 필요 없었지만, 저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형의 시선을 눈치채고 순순히 따랐다.

 

학교가 마치고 서둘러 집으로 달려간 한유진은 가방도 채 내려놓기 전에 동생부터 찾았다. 다행히 무사히 집으로 온 한유현이 방에서 나오며 제 형에게 안겼다. 형이 이렇게까지 저를 반긴 적이 있던가. 물론 싫은 건 아니었다.

한유진은 늘 본인의 생일날, 동생과 함께 케이크를 나눠 먹고 집 앞 놀이터로 나가서 시간을 보냈다. 하나 케이크는 어제 먹어버렸고, 감기가 나은지도 별로 안 됐기에 오늘은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무엇 보다 나가서 놀 기분이 되지 않았다. 둘은 옷을 갈아 입고 나서 거실 소파에 그대로 늘어졌다. 평소 거실의 티비는 부모가 차지하고 있어서 볼 수 없었으나 오늘은 마음껏 틀 수 있었다. 한유진은 아동용 애니메이션을 틀어놓고 뒤로 몸을 눕혔다. 동생 보라고 튼 건데 정작 한유현은 별 관심 없는 모양인지, 제 형을 따라 옆에 눕고선 커다란 눈을 끔벅였다.

 

“재미없어?”

“응.”

“…그래? 그러고 보니 유현이 네가 뭘 좋아하는 지도 잘 모르네.”

 

형인데도 말이야. 뒷말은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됐었다. 형이건 부모건, 한유현을 가장 잘 알고 살펴봐 주는 건 한유진밖에 없었으니까. 애초에 한유현도 본인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잘 몰랐다.

 

“유현이는 뭐가 좋아?”

 

어쩐지 외로워 보이는 한유진을 보며, 한유현은 제대로 생각하기도 전에 대답했다.

 

“형.”

“응?”

“형이 좋아.”

 

뒤늦게서야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 의문이 생겼지만, 틀린 말도 아니니 정정하려 들진 않았다. 한유현은 형이 좋았다. 한유진이 좋았다.

 

“푸핫, …고마워. 나도 우리 유현이 많이 좋아해.”

 

한유진이 웃으며 말했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예전엔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말에 적어도 세 명은 입에 담았을 터다. 그러나 이제는 한유현밖에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도, 저를 좋아해 줄 사람도.

한유현은 형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한유진이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한유현이 손에 노란색 카드와 빨간 색종이 꽃을 들고나와 한유진에게 건넸다. 카드에는 어설프면서도 전혀 유치원생답지 않은 유려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아까 집에 돌아오고 나서 한유진이 오기 전에 만든 거였다.

 

“형아, 생일 축하해.”

 

한유현이 여태껏 한유진의 생일을 축하해 준 적이 있던가. 한유진이 파르르 떨리는 팔로 한유현을 와락 안았다. 어깨가 축축이 젖어감을 느끼며, 한유현도 마저 형을 안았다.

만약 동생마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렇다면, 진작 무너졌을 거다. 그러니 저를 위해서라도, 한유현을 위해서라도 서로를 꽉 붙잡아야 했다. 이젠 한유현이 한유진의 세상이었다.

 

“고마워, 유현아….”

 

그리고 그건, 한유현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서로의 세상이자 근원이었다. 이젠 정말, 서로밖에 남지 않았다.

 

 

***

 

 

한유현은 저 멀리 떨어져 함께 걷는 원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화단에 핀 매화꽃을 바라봤다. 원장은 집 앞까지 왔으니 선생의 본분은 마땅히 지켰다고 판단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한유현은 멀뚱멀뚱 꽃을 쳐다보다가 성큼 화단에 들어섰다. 어제 한유진에게 선물을 주자 굉장히 기뻐하던 게 기억에 남았다. 왜인지 형은 울어버렸지만, 그게 싫어서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손을 번쩍 들었음에도 거리가 한참 모자라기에 한유현은 가방을 멘 채로 나무를 탔다. 분명 처음 타는 건데 너무나 능숙하게 올라가더니 제 손보다 큰 나뭇가지를 우둑, 뜯어버렸다. 그리고는 폴짝 뛰어내려 유유히 화단에서 빠져나왔다. 굵은 가지를 꺾었지만 달린 꽃가지는 몇 개 없었기에 그것만 다시 뜯어내고 손에 쥐었다. 그러자 한 노인이 버럭 호통을 치며 다가왔다.

 

“화단에 들어가면 안 돼! 가지가 부러져 있었다 해도 꽃을 꺾어 가면 안 되지!”

 

한유현은 손에 든 지팡이로 저를 가리키는 노인을 마주 봤다. 화가 나지도, 억울해하지도 않는, 정말 무감각한 눈빛이 보통 여느 아이와는 확연히 달랐다. 노인이 순간 뒷걸음질을 쳤다. 한유현이 마치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냐는 듯한 표정으로 일관한다. 노인이 지팡이를 더 격하게 흔들며 소리쳤다.

 

“어, 어느 집 애냐! 부모는 뭐하고 이런!”

 

아까보다 훨씬 더 커진 목소리였지만, 기세는 한층 수그러진 상태였다. 한유현에게 있어서 저를 무서워하는 어른은 너무나도 흔하고 당연했기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꽃가지를 한유진의 책상 위에 올려두고 손을 씻고 있자 오늘은 일찍 마쳤는지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한유현은 곧장 방으로 들어가 꽃을 들고 형에게 다가갔다. 그것을 건네자 한유진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활짝 웃어 주었다. 하지만 이내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휘며 꽃가지를 들고 있는 동생의 손을 잡았다.

 

“나뭇가지를 함부로 꺾으면 안 돼, 유현아.”

 

아까 노인이 한 말이랑 같은 맥락이었는데도 그 안에 담긴 온기는 달랐다. 온전히 저를 걱정하며 하는 말이었기에, 한유현은 그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착하다, 내 동생….”

 

깨지지 않을, 고요한 평화. 앞으로도 이 평화가 지속되기를. 앞으로도, 유현이의 옆에 내가 있고 내 옆에 유현이가 있기를. 한유진은 속으로 소망하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뭐야?”

 

한유진은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며 문 앞에 놓인 매화꽃을 내려다봤다. 이 꽃이 이 계절에 피는 꽃이었던가? 그냥 무시하고 들어가려다 문득, 기억의 저편에 묻어놨던 단편적인 장면이 떠올랐다. …설마. 그럴 리가 없었다. 혹시 몰라 차단했던 번호까지 풀어놨건만, 연락이 오기는커녕 전화도 받지 않았다.

우연인 거겠지. 요새 날이 풀렸으니 이르게 핀 걸 수도 있었다. 그게 굳이 오늘이 생일인 저의 집 앞에 놓여 있는 것에 일일이 의미 부여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일단은, 그래. 한유진은 조심스레 꽃을 주워다 들었다. 자세히 보니 꽃집에서 파는 형태로 제대로 포장까지 되어 있었다. 꽃잎을 몇 번 어루만진 뒤, 차갑게 식은 공기가 내려앉은 집으로 들어섰다.

 

“…? 방금….”

 

…등이 후끈했던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꾹 깨물던 한유진은, 한참을 뒤만 쳐다보다가 겨우 고개를 돌렸다.

굳게 닫힌 오래된 현관문 앞으로 새까만 불길이 일렁이다가 이내 파삭, 사라진다. 허공에 흔들리는 연기가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한참이나 떠돈다.

​킨비 님 (@BEe_qU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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